에너지

"40대 끝자락, 베토벤이 특별하게 다가와"

Oct 29, 2024 IDOPRESS

피아니스트 김정원 인터뷰


초등3년때 연주했던 변주곡


쇼팽보다 시시하다 느꼈지만


지금은 유년시절 추억으로


12월 독주회 '자화상'서 연주


사색 담은 리스트 소나타도


"무아지경 몰입,음악서 경험"

피아노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 카메라를 바라보는 피아니스트 김정원. 한주형 기자

무대 위 연주자가 음악에 무아지경이 되는 때보다 더 큰 환호의 순간이 있을까. 피아니스트 김정원(49)은 그 최대치의 몰입을 오직 음악에서만 느껴봤다고,그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그 희열의 순간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오는 12월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 등을 선보인다. 공연 제목은 'Dear Myself: 자화상'이라고 붙였다. 거장들의 음악을 통해 자신에게 쓰는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본격적인 리사이틀 준비에 돌입했다는 김정원을 그의 연습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부암아트홀에서 만났다. 푸릇했던 나무가 잎을 떨구기를 기다리는 계절,멀리 북한산이 물들어가는 풍경이 보이는 큰 창 옆에 피아노 두 대가 있고 작은 책상과 거울만 있는 단출한 공간이다. 김정원은 오전에 라디오 DJ 진행을 마치면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이곳에서 연습하고 있다.


이번 연주회의 핵심인 리스트 소나타는 그가 무대 위에서 13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곡이다. 그는 "30분 내내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곡이라 30대 중후반이던 당시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건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50이 다 돼서 다시 치려고 하니 확실히 겁은 난다"고 웃어 보였다. 그런데도 곡을 다시 꺼낸 건 "체력적 고통보다 특별한 전율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용적으로도 훨씬 무르익었다. 그는 "어렸을 땐 찾지 못했던 느낌도 많이 보인다"고 했다.


처음 연주회 무대에 선 것이 열한 살,이후 40년 가까이 그가 무대 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터뜨린 것도 이 곡을 연주했을 때였다. 일반적인 소나타 3악장 혹은 4악장 구조를 따르지 않은 파격적인 단일 악장 곡이지만,굳이 따지면 2악장 중간 부분에 폭발하듯 감정이 터지고 이후 가라앉는 부분이 있다.


김정원은 "20대 초반 무렵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할 때였는데,그날 무대에선 유달리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감정이 터졌다"고 했다. "흔히 무대 위에선 청중을 감격하게 해야지 아티스트 본인의 감정이 격해지면 안 된다고들 하죠. 저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무대에서 이만큼 감정이 터져보는 경험은 연주자에게 소중하더군요. 마치 자다 깼을 때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딘가' 생각하지 못할 때처럼,연주를 마쳤을 때 꿈꾸고 나온 듯할 때가 있어요."


이번 공연에서 베토벤과 리스트를 조명하는 건 김정원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개인적인 의미도 있다. 베토벤의 곡 중에서도 동요 같은 단순한 선율이 특징인 파이젤로의 '내 마음이 허전해서'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으로 문을 여는데,베토벤의 초기작일 뿐 아니라 김정원이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처음으로 접한 베토벤 곡이었다. "막상 그때는 쇼팽,리스트의 화려한 곡을 동경하면서 이런 곡은 시시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에 와서 특별해졌죠. 피아노 가방 들고 학원에 왔다 갔다 하던 풍경,선생님께 자로 손등을 맞아가면서 피아노 치던 기억,또래와 달리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거든요. 그때를 떠올리면 음악이 저를 선택해준 게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던 서른한 살에 만든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도 선곡했다. 셰익스피어가 지은 동명의 희곡에서 따와 후대에 붙은 곡명이지만,청춘의 질풍노도와도 잘 어울린다. 김정원은 "흔히 베토벤은 진지하고 깊이 있는 음악가,리스트는 화려하고 과시적인 음악가라는 편견이 있지만 의외의 면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쇼팽 말년의 음악을 모아 '마지막 작품들'이라는 음반을 냈던 그는 이번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중 11번 '저녁의 선율'을 통해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는 "40대의 마지막 독주회인 만큼 그런 감성이 내게 많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짧고 자극적인 영상이 인기를 끄는 '도파민'의 시대에 클래식 음악은 길고 느린 것이 주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내 클래식 아이돌 1세대로 꼽히던 청년 피아니스트에서 이젠 사색이 어울리는 중견 피아니스트가 됐다. 요즘 그의 화두는 '생각 덜어내기'다. 그는 "오래오래 음악을 하고 싶거든요. 매년 한 차례는 독주회를 열고 싶은데,올해까지만 사색적인 걸 하고 내년에 50대가 시작되면 더 희망적이고 반짝반짝한 음악을 하고 싶네요."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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