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20년전 실패' K바이오 성공 밀알 됐다
코스닥 상장된 기업 12곳
6년만에 몸값 10배이상 늘어
기술수출 최소 15조 달해
대학교수만 170여 명 배출
국내 생태계 전반에 두루 포진
끈끈한 인맥으로 시너지 내며
제약바이오 수준 한차원 높여
◆ LG생명과학의 유산 ◆
LG생명과학(현 LG화학)은 '대한민국 바이오 사관학교'로 불린다. 이 회사 연구소는 1980년대부터 아시아 최대 규모였고,당시 최고 인재였던 석박사 연구원들이 독립하면서 K제약바이오 산업을 키웠다. 이 회사 출신 바이오벤처 창업자만 30명이 넘고,대학교수는 170여 명에 달한다. 유망한 신약후보물질 발굴과 임상시험,상업화 단계까지 국내 생태계 전반에 LG 출신 전문가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한때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 연구원 3명 중 1명은 LG OB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최근 굴지의 글로벌 제약사들이 잇달아 K바이오에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 같은 LG 출신들의 활약 덕분이다. 조 단위 기술이전 계약을 줄줄이 이끌어낸 박순재 알테오젠 대표와 김용주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 대표,비상장회사인 오름테라퓨틱의 이승주 대표가 모두 LG 출신이다.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인 온코닉테라퓨틱스와 제노스코 등 LG 출신이 창업한 비상장 바이오벤처는 20여 곳에 이른다.
1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LG생명과학 기술연구소 출신들이 세운 국내 바이오벤처 가운데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 12곳의 시가총액은 지난달 27일 기준 21조원을 돌파했다. 2018년 2조원을 넘어선 후 6년 만에 기업가치가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들 기업이 최근 6년간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체결한 기술수출 계약 규모는 최소 15조원에 달한다.
LG생명과학 연구원 출신으로 2015년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를 창업한 이정규 대표는 "LG생명과학은 1980년대 초반부터 바이오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출신 연구원들이 상당하다"며 "벤처 창업에 나선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후배들도 꿈을 키우면서 많은 바이오벤처가 탄생했다"고 전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이들 기업이 국내 바이오 기업의 성공 방정식을 새로 쓰면서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와 같이 개별 신약의 임상에 목을 매기보다는 이미 개발된 의약품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이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의약품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사들이 서로 경쟁하면서까지 K바이오 플랫폼 기술을 도입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대부분 바이오벤처가 한두 가지 후보물질만 가지고 임상 성공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유상증자나 전환사채(CB) 등 각종 자금조달 수단을 총동원했다"며 "이후 임상 실패로 주가가 폭락하면 용법을 살짝 바꿔서 다시 임상에 들어가고 다시 자금조달을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이제는 단일 플랫폼으로 수십 개의 임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회사가 대거 탄생했다. 플랫폼을 보유한 기업은 임상이 실패하더라도 다양한 신약후보물질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만큼 신약 개발만 하는 기업보다 안정적이고 다양한 방식의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실제 기존 약품의 주사 제형을 바꿔서 효능을 높이거나(알테오젠),기존 항암제에 항체를 붙여 특정 암만 타기팅하도록 하거나(리가켐바이오·오름테라퓨틱),기존 약물의 약효 지속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려주는(펩트론) 플랫폼이 글로벌 제약사들 사이에서 몸값을 높이고 있다.
2008년 알테오젠을 창업한 박순재 대표는 LG생명과학에서 18년간 쌓은 경험으로 코스닥 시가총액 1위 기업을 키웠다. 그는 LG생명과학 재직 당시 11개 바이오 제품을 상업화하고 B형간염 백신의 세계보건기구(WHO) 승인,인성장호르몬의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성공시켰다. 특히 해외 사업 개발과 사업 제휴,라이선싱아웃 등을 담당하며 다양한 글로벌 제약사,바이오 기업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사업 개발 경험을 축적했다.
2006년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현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를 설립한 김용주 대표는 LG에서 세계적인 항생제 '팩티브(Factive)'의 모태가 된 '퀴놀론계 항생제'를 개발했다. 1983년 LG화학 기술원에 입사해 2005년 LG생명과학 신약연구소장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LG에 몸담았다. 리가켐바이오의 항체·약물접합체(ADC) 플랫폼 '콘쥬올'은 김 대표가 LG에서 쌓았던 신약 개발 노하우를 집약한 결과물인 셈이다.
최호일 펩트론 대표는 1997년 창업한 국내 바이오벤처 1세대다. 그는 LG화학 바이오텍연구소(현 LG화학 생명과학사업본부)에서 근무하며 에이즈 치료제와 실험실 자동화 시스템을 연구하다 자동화 시스템을 가지고 창업에 나섰다. 외환위기 사태로 투자 유치가 무산되자 최 대표는 상대적으로 돈이 덜 들어가는 펩타이드 합성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최 대표가 LG생명과학에서 에이즈 치료제 개발을 위해 펩타이드 합성을 한 경험이 스마트데포 플랫폼 탄생의 자양분이 됐다는 평가다.
2016년 오름테라퓨틱을 창업한 이승주 대표도 5년간 신약 개발 연구원으로 일했던 LG맨이다. 글로벌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미국 소재 글로벌 바이오테크 '버텍스 파마슈티컬' 등과 최근 2년 새 총 1조50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FDA 승인을 받은 최초의 국산 항암제 '렉라자'의 원개발사인 제노스코는 LG생명과학 신약연구소장 출신인 고종성 대표가 이끌고 있다. 이 밖에 LG 출신이 창업한 바이오벤처로는 프로티움사이언스,제뉴원사이언스,파이메드바이오,메타센테라퓨틱스,알토스바이오로직스,스탠다임,온코닉테라퓨틱스,캅스바이오,아크로셀바이오사이언스,이노보테라퓨틱스 등이 있다.
[양연호 기자 / 김지희 기자]